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총독부 청사 (문단 편집) === 청사 건립 === * [[http://theme.archives.go.kr/next/place/generalOutline.do?flag=5|국가기록원 자료 참고]] * [[http://egloos.zum.com/epoque/v/4112102|중앙청 시절의 건물 내부와 그 인근 건물들을 다룬 포스팅]] [[1910년]] [[경술국치]] 이후, 조선총독부는 [[남산(서울)|남산]] 왜성대의 [[주한일본공사관|일본공사관]]을 청사로 사용했지만, [[1908년]]에 건립된 [[용산구]]의 통감부 건물 역시 별도로 계속 운용했다. 그러나 직원 수는 늘어나고 사절들은 점점 많이 내방하고 온갖 기관들을 통괄하느라 업무량이 폭증했다. 그래서 1910~1911년에 증축했지만 택도 없었고, 결국 넓은 청사를 신축하기로 했다. 원래는 [[서울특별시청|서울시청]] 자리 등이 부지로 꼽혔지만 당시 총독 [[데라우치 마사타케]]가 반대해 무산되었고, 건축가 이토 주타(伊東忠太)[* 이 사람은 [[메이지 신궁]], [[조선신궁]]도 건축했다.]가 [[경복궁]] 터로 정했다. 신 청사의 부지로 행정적으로 편리한 장소를 채택한다는 구실을 내세웠지만, 실제로는 조선인의 문화·역사·민족적 심리를 압도하고 일제의 우월성을 선전할 자리를 물색했는데, 그 자리가 바로 조선의 정궁 경복궁 터였던 것이다. [[1912년]]에 경복궁을 개조해 조선총독부 청사 건립이 본격화되면서 흥례문과 주위의 행각, 영제교 등을 철거했다. [[1914년]]에는 이듬해에 '''[[조선물산공진회]]'''(朝鮮物産共進會)를 경복궁에서 개최한다는 명목으로 경복궁의 중요 전각 몇 채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전각들을 헐어버렸다. 사실 이미 일본은 1910년 경복궁 전각 6806칸 중 4천여 칸을 경매로 내놓아 매각한 상태였고[* 일본인들에게 매각된 전각들은 일본 기생집, 별장에 활용되거나 개인 미술관에 전시되는 경우도 있었다. 이 중 하나는 [[온돌]] 째로 호텔로 개조돼 유명한 건축가 [[프랭크 로이드 라이트]]가 묵은 후 현대식 난방 체계를 만드는 시작점이 되기도 했다.] 이렇게 확보된 자금은 청사 건립에 사용됐다. [[1912년]]부터 조선철도호텔을 설계한 [[독일인]] 건축가 게오르게 데 라란데(George de Lalande)가 설계에 착수했으나 [[1914년]]에 기초 설계만 남긴 채 사망했고, 그 뒤에는 [[일본인]] 건축가 노무라 이치로(野村一郞),[* 대만총독부 신청사 건립 참여자.] 구니에다 히로시(國枝博) 등이 청사 설계를 완성했다. 건물의 큰 틀은 네오 바로크 양식에 가깝지만 세부적인 의장은 일본의 독자적인 것이다.[* 일제가 남긴 문서에는 조선총독부의 양식을 근세부흥식(近世復興式)이라고 표현했는데, 단어는 대략적으로 [[https://ko.wikipedia.org/wiki/네오르네상스_건축|네오 르네상스]] 양식을 말하는 경우가 많다. 이에 따라 한국에서도 이 건물의 양식을 네오 르네상스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지만, 사실 건물의 전체적인 양식은 네오 르네상스보다는 네오 바로크에 가깝다. 물론 세부 의장은 일본의 독자적인 것을 사용했다.] [[1916년]] 6월 26일 지진제 거행 후 공사를 시작했다. 처음에는 기간 5년에 비용 300만 [[일본 엔|엔]] 정도로 예상했지만, 실제 완공은 10년 뒤인 [[1926년]]에 됐고 비용은 675만 1982엔이나 소요됐다. 예산과 시간이 예상보다 갑절로 들어간 것. 이 과정에서 [[중국인]], [[일본인]] 석공 300명과 한국인 노동자 200명이 해마다 투입됐고, 시공사도 오쿠라[* 현 다이세이건설(大成建設). 창업주 오쿠라 기하치로는 [[경복궁 자선당]]을 일본으로 빼앗아갔다.]/시미즈구미[* 현 시미즈건설(清水建設). 1804년에 설립됐으며 훗날 세워진 [[국립 요요기 경기장]]과 [[선샤인 60]]도 이 회사의 건축물이다.] 경성지사였으나 비용/공기 문제로 1918년부터 총독부 직영으로 바뀌었다. 경복궁 입구 역할을 하던 [[경복궁 광화문|광화문]] 역시 조선총독부 건물 완공과 때를 같이 해 [[경복궁 건춘문]] 옆으로 옮겼다.[* 이를 그린 수필이 설의식의 '헐려 짓는 광화문'이란 작품으로, 과거 6차 교육과정 당시에는 국어교과서에도 실려 있었기에 현재 40대 이상의 중장년층들은 한 번쯤은 읽어본 글이다.] 일제는 광화문을 옮긴 후 그 자리를 '총독부 광장'이라 부르면서 각종 옥외 행사를 이곳에서 거행했다. 해방 이후에도 이곳은 1968년 광화문이 복원될 때까지 군정청 광장, 중앙청 광장 등 이름만 달리하며 여러 관제 행사의 개최 장소로 사용됐다. 한편 조선총독부는 [[1937년]]에 [[경복궁]] 북쪽에 총독 관저를 신축했다. 이곳은 [[8.15 광복]] 이후 [[경무대]]를 거쳐 지금의 [[청와대]] 부지가 되었다. 1930년대 말 전시체제 도입으로 총독부 조직을 확충하면서 1937년 제1별관, 1940년 제2별관을 각각 신축했다. [[http://theme.archives.go.kr/next/place/governmentOffice.do?flag=5|#]] 1940년대 초반에 제3별관도 신축했지만 정확한 완공년도는 미상이다. 이중 1별관은 광복 후 문화공보부 등 부속 기관들이 입주했다가 1982년 이후 철거됐고, 3별관은 1969년부터 총무처 [[정부기록보존소]]가 자리잡다가 1983년 [[정부중앙청사]]로 이전 후 1986년에 철거됐다. ||<:>[[파일:external/cdn.amanaimages.com/26058022560.jpg|width=100%]] || || 일본 국회의사당 청사 || 4년 늦게 착공된 [[국회의사당(일본)|일본 국회의사당]] 건물과 외관과 구조가 비슷한 편. [[경복궁]]의 신청사로 이전한 뒤 [[남산(서울)|남산]]의 구 통감부 청사 건물은 '은사기념과학관'이라 하여 일본의 과학기술과 공업 성취를 선전하는 과학전시관으로 사용하였고, 1945년 해방 후에는 국립과학관으로 바뀌었다. 그러나 통감부 청사는 [[6.25 전쟁|한국전쟁]] 당시 완전히 파괴됐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